튼튼하고 믿음직한 징검다리가 되어

며칠 전 로즈마리가 심어진 자그마하고 앙증스런 빨간 화분 하나를 선물 받았다. 로즈마리향을 좋아한다고 하였더니 잘 키우라는 말과 함께 보내주셨다.
로즈마리는 잎을 스치기만 해도 향이 진하게 묻어난다. 로즈마리향은 심신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데 주로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 신경성 두통 치료 등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2년 정도 우리 집에 있던, 사실 키웠다고 하기는 좀 미안한 행운목을 어느 댁에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날 그 빨간 화분을 선물 받았다.

나는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한다. 그동안 내게 온 식물들은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시들시들하게 있다가 결국 수명을 다하고는 했다. 수시로 살피면서 물도 주고 말도 걸어주고 잎도 닦아주어야 하는데 밍밍하게 지내다가 문득 생각나면 물 한번 주고 어쩌다가 물수건으로 잎에 쌓인 먼지나 닦아주니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식물도 사람처럼 조용한 음악도 틀어주고 주인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 더 잘 자란다고 한다. 논에서 자라는 벼도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가, 집에서 개를 키웠다. 고모 댁에서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우리 집에 암, 수 두 마리를 주어서 받아 키웠던 것이다. 몇 달 후 제법 어른 티가 났을 때 엄마가 집도 좁고 못 키우겠다며 팔아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으면 해서 그냥 우리 집에서 키우면 안 되냐고 했다. 엄마는 지금도 복잡하고 계속 클텐데 그러면 집이 더 어지러울 거라 하시며 며칠 동안 우리에게 예고를 하시더니 어느 날 지나가던 개장수에게 팔아 버렸다.

그날 창피한 줄도 모르고‘엉엉’큰 소리로 한참 울었다. 태어나서 처음 맞이한 이별은 열 네살 한창 감수성 예민한 나이의 여자아이에게는 크게 슬픈 사건이었다. 돌아보면 그 이후부터 였다. 누구를 만나면 그 즉시 헤어짐을 생각하였었다. 개는 물론이고 분명 이별을 하게 될 것은 어떤 일도 만들지 않았고 혹시 생각지도 않은 헤어짐의 슬픔이 생기면 온 힘을 다하여 스스로를 뻣뻣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어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 하였다. 만남은 언제나 헤어짐이라는 끝이 보이는 시작이고 그 때 만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몹시 불편하였다. 그래서 세상만사가 무척 쉽거나 매우 어려웠고 딱히 즐겁지 않았으며 점점 진지하고 심각해지면서 삶 전체가 무거워졌다.

심리학을 공부 할 때 우연히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내 경험을 얘기했더니 의외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 때 지도교수님이‘학습의 습관화’라는 이론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학습은 개인의 경험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의 변화를 일컫는 말로 학습된 행동을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반복되는 자극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것을 습관화라 한다." 그 때 지도교수님은 그런 경험 즉, 개와의 이별을 한 번 더 경험하면 앞의 그 슬픔이 오히려 치유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열 네살은 어둠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구나 이 일이 금생에서 겪을 어둠의 시작이었음을 감지하기에는 더욱 어리다. 어떤 사람은 더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와 이별하는 사람도 있는데 호강에 겨운 사치라고 하겠지만 유독 내가 이러하였던 것은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이전에 생긴 마음의 무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별로 표 나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던 개와의 이별이 그동안 조금씩 생겨난 이번 생에 해결해야 할 우울에 결정타를 친 것 같다. 그늘진 마음은 더 짙은 그늘하고만 친하려 했고 가끔 주어진 햇살도 해 떨어지면 곧 사라질 것이라며 오래도록 힘 있게 품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혈연도 결국은 몹시 이기적이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짙은 그늘은 어둠 속으로 더 깊숙이 곤두박질 쳤다.

'미리 끝부터 생각해 버리는' 그 부작용은 참 컸다. 사람 사는 세상에 적극 참여하면서 살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부딪힘이 부담스럽고 그 자체가 힘이 들었다. 죽기 살기로 덤빈 적이 없고 항상 방관자처럼 멀찌감치에서 혼자 둥우리를 틀고 살았다. 헤어짐이라는 끝이 보이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일도 깨부숴 버릴 줄만 알았고, 뒷감당을 못해 혼자 쩔쩔매기도 했다. 뭐든 그저 끝만 보느라 꼭 지켜주어야 하는 혈연조차 보호하고 지켜주지 못했다.

폭풍처럼 거칠고 무섭던 슬픔이 싫어서 무조건 피했다. 그게 그렇게 두려웠구나. 가여운 것. . .
만남도 좋고, 헤어짐도 좋고,‘만남은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만나는 것이고, 만날 이유가 다 되어 다가온 헤어짐은 오히려 좋은 건데.

이제는 끝이 있다는 건 알아도 끝만 보진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문득 문득 놓아버린 정신줄도 챙긴다. 나는 이 세상의 튼튼하고 믿음직한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 가슴 시린 이별에, 캄캄한 절망에 어쩔 줄 모르는, 쇠보다도 단단한 업덩어리를 버티며 가고자 염원하는 그 곳으로 가려는 인연들이 발 젖지 않고 뽀송뽀송하게, 이왕이면 기분 좋게 저 들판으로 건너가게 해 주고 싶다.